북한이 바라본 허균은?

 


(2015-11-09) 북한이 바라본 허균은?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소설로 한국 국문학사에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북한 또한 허균을 진보적인 작가로 보고 있으며 홀길동전 역시 문학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 조선의오늘은 11월 8일 허균의 인생체험이 소설 홀길동전 탄생에 큰 영향을 줬다는 글을 게재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오늘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16세기말 17세기초 중세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한 진보적인 작가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허균의 집안이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거족이였는데 아버지 허엽은 물론 형들인 허성과 허봉, 누이동생인 허란설헌이 모두 우수한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중세문학사에서 그 이름을 날렸다고 지적했습니다.


 


조선의오늘은 허균이 가정적 환경과 스승 이달로부터 큰 영향을 받으며 재능있는 문인으로 성장했는데 그의 스승 이달이 문장이 뛰여나고 학문탐구에 열중한 재사였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벼슬을 못하고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은 이런 스승의 불행한 모습이 허균에게 봉건적신분차별 제도에 의혹과 불만을 품게 했으며 이것이 사회현실을 비판적으로 대하게 하는데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북한은 허균이 임진왜란 후 벼슬길에 올라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당대 사회현실과 인민들의 처지를 체험하게 됐으며 이것을 창작에 구현했다고 해석했습니다.


 


북한은 허균이 서자출신들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로 인해 비방에 시달렸고 수차례도 가야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허균이 높은 벼슬에 오른 것을 계기로 반정부거사를 은밀히 준비했으나 발각돼 1618년 8월에 참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허균이 자기의 생활체험을 통해 봉건적 신분제도의 불합리성과 통치배들의 부당성에 점차 반감을 가지게 됐고 이것을 소설 홍길동전에 그대로 반영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소설 홍길동전초기 국문소설의 하나로서 당시 심각하게 제기된 적서차별을 주장하는 사상을 담은 것으로 문학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도 밝혔습니다.
 


북한은 홍길동전이 봉건통치제도 자체를 부인하고 인민대중을 위한 사회를 세우려는 옳은 요구를 제기하지 못한 제한성이 있으나 부패한 사회와 결별하는 주인공 홍길동의 투쟁을 진실하고 생동하게 형상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이에 따라 허균이 중세소설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북한은 허균과 홍길동전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북한은 문학적 가치 보다는 홍길동전의 속 혁명에 관한 사상적 가치에 긍정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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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4 – 북한 “홍길동은 실존인물,오키나와로 갔다”



강진규 wingofwolf@gmail.com


 


 

북한 “홍길동은 실존인물,오키나와로 갔다”

 


(2015-05-14) 북한 “홍길동은 실존인물, 오키나와로 갔다”


 


 


북한이 허균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대북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 조선의오늘은 5월 14일 “최초의 극문학소설인 허균의 작품 홍길동전에 나오는 주인공 홍길동은 전설 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지로 존재한 인물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사진1> 북한 영화에 등장하는 홍길동 모습


 


조선의오늘은 조선왕조실록에 홍길동을 도적 또는 강도라고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황윤석이 쓴 야담집에는 ‘홍길동이 첩의 자식이라 과거를 볼 수 없어 집을 떠나 의적활동을 하다가 해외로 탈출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북한은 홍길동의 이복형인 홍길형이 1420년경에 태여났으며 홍길동의 출생은 1420년 이후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또 홍길동이 태여나 청소년를 보냈다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치실 마을에는 그가 마시며 자랐다는 길동샘이 있고 북쪽 10㎞지점에서는 홍길동의 할아버지의 묘가 발견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은 홍길동이 첩의 자식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점에 반감을 품고 1467년에 집을 뛰쳐나가 경상도에서 학조대사라는 스승으로부터 불교와 도학을 배운 후 충청남도 공주 지방에서 의적으로 활동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홍길동이 1489년경부터 활동 무대를 전라남도 병풍섬, 고이섬을 비롯한 서남해안 일대로 옮겼으며 1500년 연산군 6년 지리산 임실 근처에서 관군에게 잡혔지만 풀려났다고 소개했습니다.


 


북한은 홍길동이 부하들을 이끌고 소설에 나오는것처럼 율도국으로 가게 됐으며 그 율도국이 지금의 오키나와 열도의 최남단 섬 일대라고 주장했습니다.


북한은 오키나와에 ‘홍가와 라적봉비’가 있으며 여기에는 봉건제도를 반대하고 자유인권을 보장하며 섬사람들을 위해 활동한 용맹한 영웅이라는 비문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에서도 허균이 실존했던 도적 홍길동을 모티브로 소설 홍길동전을 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북한은 한발 더 나아가 실제 홍길동과 소설 속 홍길동을 일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국의 일부 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도 홍길동이 오키나와로 갔다고 주장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북한은 홍길동전에 대해 우호적입니다. 북한은 홍길동의 활동을 자본주의, 봉건제도에 대한 항거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자신들의 이런 생각을 반영한 홍길동의 모습을 주민들에게 알리는데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강진규 기자 wingofwolf@gmail.com